진학 상담을 하러 온 한 중3 학부모가 학원 분석 결과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A고등학교에 가면 1등급, B고등학교에 가면 2등급이라더군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학생의 흥미와 적성이 아니라 '내신 따기 쉬운 학교'를 사교육이 골라주는 시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학업 부담을 줄이겠다던 고교학점제와 내신 5등급제가 오히려 사교육 의존을 심화시키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짚어봤습니다.

내신 배치고사, 교단에서 마주한 풍경
매년 연말이면 중3 담임교사들의 진학 상담실은 분주해집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올해는 그 분위기가 예년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학부모들이 학원에서 받아온 '고교 선택 배치고사' 결과표를 들고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 강남권의 한 영어학원은 대원외국어고, 휘문고, 숙명여고 등 학교별 중간·기말고사 기출문제를 축적해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의 배치고사를 실시했습니다. 여기서 '기출 배치고사'란 특정 고교에 진학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내신 등급을 사전에 예측하도록 설계된 시험입니다. 쉽게 말해, 어느 학교에서 1등급을 따기 쉬운지 미리 가려내는 도구인 셈입니다.
한 수학학원 프랜차이즈는 한발 더 나아가 학생의 자기주도성이나 경쟁에 대한 태도까지 측정하는 '고교 선택 정밀진단'을 운영한다고 홍보했습니다. 같은 실력이라도 성향에 따라 유리한 학교가 달라진다는 논리입니다. 이 마케팅을 처음 접했을 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의 적성과 진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등급 유불리'를 기준으로 학교를 상품화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현상이 강남에만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대전의 한 학원도 지역 내 8개 고교의 국어·영어·수학 기출문제를 분석해 예상 내신 등급과 3년 학업 계획을 제시하는 설명회를 열고 있습니다.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이 고교 교사 1,1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6.1%가 내신 5등급제 이후 학생들의 입시 경쟁과 부담이 오히려 커졌다고 응답했습니다(출처: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 저도 교단에서 그 수치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매일 체감하고 있습니다.
- 학원이 학교별 기출문제를 축적해 중3 대상 모의 배치고사 실시
- 학생 성향까지 분석해 '내신 유리 고교'를 추천하는 정밀진단 프로그램 운영
- 서울 강남뿐 아니라 대전 등 전국 학원가로 확산 중
- 고교 교사 76.1%가 내신 5등급제 이후 경쟁·부담 심화를 체감
사교육 의존과 교육 불평등, 정책의 역설
고교학점제(高校學點制)는 학생이 대학처럼 원하는 과목을 직접 선택해 이수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정해진 교과목을 일방적으로 배우는 대신 진로와 적성에 따라 스스로 수업을 설계하도록 한 것입니다. 내신 5등급제는 이 제도와 함께 도입된 성취평가 방식으로, 기존 9등급제보다 등급 폭을 넓혀 1등급 비율을 전체의 10%로 확대했습니다. 여기서 내신 5등급제란 A~E 다섯 단계로 성취 수준을 구분하되 상위 10%에게 최고 등급을 부여하는 상대평가 체계를 의미합니다.
교육부는 1등급 비율이 넓어지면 학업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상담 현장에서 겪어보니, 그 전망은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대입에서 내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대로인데 상위권 학생이 몰리는 학교에서는 10% 안에 들기가 오히려 더 치열해졌습니다. 결국 '어느 학교에 가면 10% 안에 들기 쉬운가'를 계산하는 것이 입시 전략의 핵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가 정보의 비대칭성입니다. 학교별 기출문제와 성취도 분포 데이터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해 비싼 컨설팅 상품으로 파는 것이 학원이고, 그 정보를 살 수 없는 가정의 학생은 처음부터 불리한 출발선에 서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학원에 다녀도 기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문제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게 오히려 교육 불평등(educational inequality)을 심화시키는 구조라고 봅니다. 교육 불평등이란 경제적·지역적 조건에 따라 교육 기회와 결과에 격차가 생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보 접근성 자체가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을 때, 공교육의 공정성은 허울이 됩니다.
전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는 진로·융합 선택과목부터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재학생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대입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출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제 경험상 이 방향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절대평가란 다른 학생과의 비교가 아니라 정해진 기준을 달성했는지로 성취를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진로 선택과목만큼은 등급 경쟁에서 벗어나 학생이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현행 구조에서는 그 선택마저 사교육 컨설팅에 맡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설문에 응한 교사의 98.2%가 고교학점제의 전면 폐지 또는 보완을 요구했습니다. "학생이 배우고 싶은 과목보다 등급에 유리한 과목을 찾는다"는 진단 앞에서, 이 정책이 제 의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고교학점제가 뭔지 쉽게 설명해 주세요.
A. 고교학점제란 학생이 대학처럼 원하는 과목을 스스로 골라 수업을 구성하는 제도입니다. 지난해부터 고1 전체에 전면 시행되었으며, 졸업 기준이 되는 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취지는 진로 맞춤형 교육이지만, 현실에서는 내신 등급에 유리한 과목을 고르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Q. 내신 5등급제가 되면 1등급 받기 더 쉬워지는 거 아닌가요?
A. 1등급 비율이 기존 4%에서 10%로 늘어난 것은 맞습니다. 그렇게 보면 쉬워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실상이 다르다고 봅니다.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학교에서는 여전히 1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고, 오히려 '어느 학교에 가면 10% 안에 들기 쉬운가'를 계산하는 새로운 경쟁이 생겼습니다. 교사 76%가 부담이 늘었다고 응답한 것이 이를 반영합니다.
Q. 학원에서 기출문제로 배치고사를 보는 게 불법인가요?
A. 현재로서는 명시적인 법적 제재 근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학교별 시험지가 외부에 유출·유통되는 경로의 적법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학원이 수집한 자료를 활용해 배치고사를 운영하는 행위 자체를 직접 규제하는 조항은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학교 평가 정보가 사교육 상품으로 전락하는 구조 자체가 공교육의 신뢰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학원 안 다니면 정말 불리한가요?
A. 학교별 기출문제와 성취도 분포 데이터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대량으로 보유한 학원을 이용하지 않고 여러 학교의 내신 정보를 수집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물론 학원 없이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다만 정보 접근성의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고, 이를 해결하려면 교육 당국이 학교별 평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정리하면, 고교학점제와 내신 5등급제가 만들어낸 가장 큰 부작용은 학생의 선택권이 진로가 아닌 등급 계산으로 쏠렸다는 점입니다. 제가 상담실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불안한 눈빛이 그 증거였습니다. 학원이 학교를 상품으로 팔 수 있게 된 것은 학원이 나빠서가 아니라, 공교육 내부의 평가 정보가 닫혀 있고 대입에서 내신의 고부담 구조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교육 당국이 해야 할 일은 사교육 탓을 하기 이전에, 학교별 성취도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진로·융합 선택과목에 한해서라도 절대평가로 전환해 학생이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 정책의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지금 중3 학부모라면 적어도 학원의 배치고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는 자녀의 관심사와 강점을 함께 들여다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