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양대 철학과 논술전형 경쟁률이 270대 1을 기록했습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철학과는 졸업 후 뭐 먹고 살래?"라는 말이 당연하게 오가던 분위기였으니까요. 그런데 AI가 자소서를 대신 써주고 탐구 보고서 개요를 뚝딱 뽑아주는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은 철학책을 더 많이 집어 들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저도 그 이유를 조금씩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실존적 공허 — AI가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
상담실에서 만난 한 학생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챗GPT가 써준 답변을 보면 그럴듯한데, 막상 면접관 앞에서 '너는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한마디도 못 하겠어요. 제가 진짜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화려하게 정제된 텍스트를 손에 쥐고도 정작 자기 삶의 주어와 목적어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건 그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몇 초 만에 매끄러운 문장을 뽑아내는 편리함 뒤편에서, 오히려 더 깊은 방황과 공허감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oid)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한 채 외부의 답에만 의존할 때 생겨나는 내면의 공백을 뜻합니다. 기술이 정답을 빛의 속도로 내놓을수록, 그 답이 정말 '내 답'인지 확인하지 못한 불안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런 감각은 서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세네카와 쇼펜하우어 같은 고대·근대 철학자의 저서가 나란히 꽂혀 있고, SNS에서는 철학자의 명언을 담은 짧은 영상이 빠르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점을 찾은 직장인이 쇼펜하우어 책을 펼치며 "아무리 고민을 AI에 얘기해도 어딘가 허무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제가 교실에서 목격한 학생들의 혼란과 정확히 겹쳐 보였습니다.
비판적 사고 — AI 시대에 오히려 더 희귀해진 능력
탐구 수업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 하나가 AI가 내놓은 매끄러운 결론을 그대로 복사해 제출했습니다. 내용은 틀리지 않았지만, "왜 이 전제가 성립해야 하는지"를 물었더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계의 답에 만족하지 말고, 이 주장의 전제를 네가 직접 반론해봐라"며 고전 텍스트를 함께 펼쳤습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그 학생이 토론이 끝날 무렵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나요?"라고 했을 때,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흥미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란 어떤 주장이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근거와 전제를 스스로 검토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지적 태도를 말합니다. 연세대 철학과 주재형 교수는 "AI는 평균적인 사고를 추구하기 때문에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사고를 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출처: 뉴시스). 무엇을 질문하고 어디서 판단을 내릴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이 능력을 오랫동안 훈련해왔습니다. 연세대 철학과 졸업반 학생은 4년간 15개가 넘는 철학 수업을 들으며 텍스트를 읽고 자기 생각을 정리한 뒤 토론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말합니다. AI를 활용할 때도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가 결과의 질을 결정하는데, 이 '질문을 구성하는 능력' 자체가 철학적 훈련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가 AI 시대에 새로 등장한 유행어가 아니라, 철학과 학생들이 이미 수년째 익혀온 일상적 학습 방식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비판적 사고: AI 답변의 전제와 근거를 스스로 검토하는 능력
- 질문 구성력: 무엇을 물을지 정하는 것은 AI가 아닌 인간의 몫
- 토론·텍스트 분석: 철학과에서 수년간 반복 훈련하는 핵심 학습 방식
- 전공 확장성: 간호학과·물리학과·경영학과 학생들도 철학 복수전공 선택
인문학 복원 — 구조조정이 낳은 역설적 청구서
올해 주요 15개 대학의 철학과 논술전형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어섰고, 연세대 철학과는 78대 1, 한양대 철학과는 270대 1을 기록했습니다. 한양대의 경우 전년 대비 37.5% 상승한 수치입니다. 이 숫자를 보며 저는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수년 전 대학 구조개혁이라는 명목으로 '돈이 되지 않는 학과'라며 철학과를 비롯한 기초 인문학 전공을 폐과·통폐합해 온 흐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복원(humanities restoration)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책을 더 많이 읽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효율성과 정량적 실용주의에 밀려 교육 현장에서 지워졌던 '사유하는 기초 체력'을 되살리는 구조적 작업을 뜻합니다. 교육 정책이 AI 디지털 교과서 보급과 첨단 기술 교육에 수조 원의 예산을 집중하는 동안, 정작 그 기술을 올바르게 활용하고 판단할 비판적 역량의 토대는 조용히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교실에서 이미 체감되는 문제입니다. 텍스트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인간의 존엄과 실존을 사유하는 독서·토론 중심의 수업이 줄어들수록, 학생들이 AI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철학과 경쟁률 급등은 그 공백에 대한 사회적 갈증이 수치로 터져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대입 논술전형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받고 싶다는 청년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사유의 상품화 — 철학 열풍이 진짜 사고로 이어지려면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철학 열풍이 불자 서점 곳곳에는 철학자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자기계발서와 명언 모음집이 빠르게 채워졌습니다. SNS 알고리즘은 쇼펜하우어나 세네카의 경구를 10초짜리 영상으로 잘라 대량으로 유통시킵니다. 겉으로 보면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지만, 연세대 주재형 교수가 경고한 대로 이는 철학을 일시적인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사유의 상품화'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출처: 연세대학교).
사유의 상품화(commodification of thought)란 본래 고통스러운 내면의 실천이어야 할 '생각하는 행위'가 소비재처럼 가볍게 포장되어 팔리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고 저장하는 데 그치는 것과, 그 주장이 타당한지 따져보고 자신의 현실에 비춰 질문을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전자는 콘텐츠 소비이고, 후자가 비로소 철학적 사유입니다.
제가 교실에서 치열하게 토론을 이어가던 순간들이야말로, 기술의 범람 속에서 학생들의 주체성과 스스로 사유하는 뼈대를 지켜주는 공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주 교수의 말처럼 철학의 본령은 타인의 경구를 수동적으로 암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와 기계적 정답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고통스러운 사유의 실천에 있습니다. 초·중·고 정규 교육과정 전반에서 텍스트 비판적 검토와 인문학적 기초 체력을 공교육의 핵심 축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AI 시대에 철학을 공부하면 취업에 실제로 도움이 되나요?
A. 제가 지도한 학생들을 보면, 철학적 훈련이 면접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자기 언어로 답하는 데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AI가 다듬어준 문장이 아닌, 자기 가치관에서 우러나온 답변은 면접관에게도 다르게 전달됩니다. 연세대 철학과 학생들도 질문 구성력과 비판적 사고가 취업 준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Q. 철학책을 많이 읽으면 사고력이 자연스럽게 깊어지나요?
A. 그렇지 않다는 게 제 솔직한 경험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깊이 사유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고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주장의 전제가 타당한지 직접 따져보고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질문을 이어갈 때 비로소 사고력이 자랍니다. 독서는 재료를 공급하는 것이고, 사유는 그 재료를 직접 가공하는 작업입니다.
Q. 철학과 경쟁률이 갑자기 오른 이유가 뭔가요?
A. 올해 주요 15개 대학 철학과 논술전형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어섰고 한양대는 전년 대비 37.5% 상승했습니다. 생성형 AI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역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는 실존적 공허감이 겹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갈증이 입시 수치로 드러난 것으로 읽힙니다.
Q. 철학 공부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A. 제가 학생들에게 권하는 방식은 유명한 경구를 모아놓은 책보다 원전 한 권을 천천히 읽고 "이 주장에 동의하는가, 반론을 댄다면 무엇인가"를 노트에 직접 써보는 것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비판적 사고 훈련이 됩니다. SNS 쇼츠 영상의 명언 소비에서 시작하더라도, 그 말의 출처 원전으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경험이 됩니다.
결론
AI가 내 삶의 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청년들이 몸으로 깨닫고 있는 지금, 철학의 귀환은 유행이 아니라 절박한 자기 탐색의 표출입니다. 그런데 그 열기가 명언 소비나 입시 기교로 소진된다면 또 하나의 콘텐츠 소비로 끝날 뿐입니다. 진짜 변화는 AI가 제시한 답의 전제를 직접 의심하고, 그 답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질문을 이어갈 때 일어납니다.
교육 당국이 AI 디지털 교과서에 수조 원을 쏟아붓는 지금이야말로, 초·중·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인간의 실존을 사유하는 인문학적 기초 체력을 공교육의 핵심 축으로 복원해야 할 때입니다.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천은 AI가 써준 문장 하나를 읽고 "이 전제가 정말 맞는가"라고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하나가 사유의 시작입니다.